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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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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방울 레이더스
Ssangbangwool Raiders[1]
창단1990년 3월 31일(34주년)
해체2000년 1월 7일(24주년)[2]
법인명㈜쌍방울레이더스
업종명스포츠 클럽 운영업
상장 유무비상장 기업
기업 규모중견 기업
구단명쌍방울 레이더스 (1990~1999)
연고지전라북도 (1990~1999)
홈구장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10,000명)
월명 야구장(12,000명)[3]
운영 법인주식회사쌍방울레이더스 (1990~1999)
모기업쌍방울
마스코트파일:external/s20.postimg.org/Bangwool_i.png
방울이
워드 마크파일:쌍방울 레이더스 워드마크.svg
포스트 시즌 진출 (2회)
플레이오프1996년
준플레이오프1997년
해체 당시의 구단 사무국 (1999년)
구단주이의철[4]
대표이사박효수
단장유은수
감독김준환[5]
프랜차이즈 구단 기록
최고 승률0.573
1997년 126경기 71승 2무 53패
최저 승률0.224
1999년 132경기 28승 7무 97패
최다 승71승
1997년 126경기 71승 2무 53패
최다 패97패
1999년 132경기 28승 7무 97패
최다 관중265,918명
1996년[6]
최소 관중49,956명[7]
1999년[8]
1. 개요
2. 역사
3. 쌍방울의 유산
3.1. 주요 기록
3.2. 연고지
3.3. 선수
4. 선수단
4.3. 프랜차이즈
4.5. 주요 선수
4.6. 최후의 선수단
4.7. 외국인 선수
4.8. 기타 선수
5. 유니폼
6. 마스코트
7. 역대 성적
7.1. 역대 포스트 시즌 상대 전적
8. 사건 사고
9. 여담



1. 개요[편집]


"내가 소싯적에 쌍방울이란 팀이 있었는데 말야..."

"정말 그런 팀이 있었어요?! 설마 팀 이름을 그렇게...?"

최훈, 프로야구 카툰추억은 쌍방울 방울...’편

1991년부터 1999년까지 한국프로야구에 참가한 대한민국의 프로 야구단. 프로야구 원년 6구단 이후에 창단한 두 번째 신생 구단으로 8구단 시대를 열었다. 홈구장은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이었으며 제2 홈구장군산시 사정동에 있는 월명 야구장이었다. 구단의 상징색은 노란색.

연고지전라북도. 구단이 존재할 당시만 하더라도 KBO 리그의 연고지 운영 방식은 광역 연고제였다. 특정 도시로 연고지를 국한하는 '도시 연고제'로 변경한 것은 쌍방울이 해체된 후인 2000년부터다. 따라서 홈구장이 전주시에 있기는 했어도 엄밀히 따지면 전주시만의 구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북 연고 구단인데도 홈경기가 열렸던 전주시군산시, 이들 지역과 연담화된 익산시 등 3개 도시 이외 지역에서는 공기 취급 받았다. 그나마 부안군, 김제시전라북도 북부권은 군산 시리즈 때문에 나름 팬들이 몰리기라도 했지만[9] 전북 남부권인 고창군, 정읍시, 남원시해태 타이거즈의 연고지인 광주광역시에 가까운 지역일수록 영향력이 약했다. 더구나 전북 동부는 더더욱 영향력이 약했다.

어쨌든 전주 시민을 중심으로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았지만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빠르게 쇠락하면서 손 쓸 새 없이 해체했다. 또한 역대 KBO 리그 참가 구단 중 유일하게 한국시리즈 진출 경험도 없이 해체된 비운의 구단이다.

2. 역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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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쌍방울의 유산[편집]



3.1. 주요 기록[편집]




3.2. 연고지[편집]


쌍방울 레이더스의 연고 지역이었던 전라북도 지역은 쌍방울이 창단할 당시에는 거의 연고 공백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물론 프로야구 원년부터 쌍방울이 참가하기 전인 1989년까지 호남지역 연고는 해태 타이거즈에 할당되어 있었고 전주에서도 해태 홈경기가 분산 개최됐지만 엄연히 해태의 핵심 본거지는 광주광역시였고 전라북도는 사실상 비어있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그 빈틈을 쌍방울이 차지하게 된 것이다. 지금까지 쌍방울이 있었다면 KIA 타이거즈와의 호남 시리즈가 확고하게 자리잡아 리그의 흥행 요소가 더 많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점이다.

쌍방울 레이더스 말년 때는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의 시설 노후화 문제로 군산시 월명 야구장에서 경기가 자주 열렸다. 그러던 것이 2000년부터는 월명 야구장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한 경기도 열리지 않았다가 2001년부터 2013년까지 KIA 타이거즈의 군산 경기가 다시 열렸다. 하지만 이후 2014년부터 기아의 홈구장이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로 바뀌면서 군산 경기는 중지되며, 군산상고와 전주고 선수들을 대상으로 1차 지명권을 갖게 된 NC 다이노스가 군산 홈경기를 유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1차 지명권 행사와 제2홈구장 경기는 엄연히 별개의 사안이기에 조용히 접었다.

쌍방울의 해체는 전북지역 아마야구에도 타격을 주었다. 군산상고와 전주고 모두 타 지역으로 전학하는 선수들이 속출하며[16] 야구부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그 후유증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태다. 군산상고는 그나마 사정이 좀 낫지만 전주고는 아예 중학교 선수들이 전주고 야구부로 입학을 기피한 나머지 한동안 선수 부족으로 선수권 대회나 고교 리그에 참가조차 못할 정도로 심각한 흑역사를 보내야만 했다. 2010년대 들어 새로운 아마야구 팀들이 속속 창단하고 있지만 전북 지역은 정읍시와 고창군, 그것도 읍면 지역에 속한 학교에서만 창단했을 뿐[17] 정작 전주시, 군산시, 익산시에는 단 한 팀도 창단 소식이 없다.[18]


3.3. 선수[편집]


전주시민들에게 남겨진 추억이나 좋은 기록이든 나쁜 기록이든 범접하기 어려운 기록들도 눈여겨 볼 만하지만, 쌍방울이 야구계에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역시 선수들일 것이다. 비록 팀은 해체되었지만 돌격대에서 발굴(혹은 부활)한 선수들은 이적한 팀에서도 준수한 활약을 펼쳤으며, 일부는 지도자로 변신하여 지금 이 순간에도 KBO 리그의 발전에 힘을 보태고 있다.[19]

2011년 기준, 쌍방울 출신 선수는 김원형, 박경완, 오상민, 이진영 이렇게 4명이 남아있었다. 그러나 2011 시즌 초에 오상민은 도박사건으로 방출되어서 사실상 선수 생활이 끝났고, 2011년 시즌을 끝으로 김원형은 은퇴했다.

2013년 10월 22일 박경완이 은퇴를 선언하고 2014년 4월 5일 한화와의 경기를 끝으로 은퇴를 하면서 마지막 쌍방울 출신 선수는 이진영이 되었다. 군산상고졸업하고 1999년 1차 지명을 받아 입단한 이진영은 쌍방울 레이더스에 입단한 마지막 신인 선수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이진영만 계약했고, 당시 모기업에서 계약금으로 줄 돈도 부족하여 김성근 당시 감독이 일부 보조했다고 한다. 2018년 정규시즌이 끝난 뒤 10월 19일 이진영의 은퇴가 공식 기사화되어서 쌍방울에서 1년이라도 뛰었던 선수는 전원 추억 속으로 떠났다.

굳이 쌍방울에 지명되거나 연습생 시절을 거치고 현역으로 있는 선수를 찾자면 이대수(SK 연습생)가 있었는데, 2018년 정규시즌 종료 시점에서 은퇴를 선언했다. 따라서 유일하게 박정권(2000 지명, SK) 한 명만이 남아있었다. 박정권은 쌍방울의 지명은 받았으나 바로 동국대학교로 진학하였고, 졸업 후에는 쌍방울의 지명권을 가져간 SK에 입단하게 되었다.[20]

결국 2019년을 끝으로 박정권도 은퇴하면서 이제 쌍방울 출신 현역 선수는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4. 선수단[편집]



4.1. 선수단 목록[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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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등번호[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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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프랜차이즈[편집]


이름등번호포지션소속년도
김기태10내야수1991~1998
조규제18투수1991~1998
김원형16투수1991~1999
박경완28포수1991~1997
김기덕30투수1991~1999
최태원7내야수1993~1999
김현욱46투수1995~1998
김광림33외야수1994~1997, 1999
김호5내야수1990~1999
성영재17투수1993~1999
조원우36외야수1994~1999
심성보35외야수1995~1999
박성기31투수1991~1998
박진석11투수1991~1999
김성근91감독1996~1999


4.4. 2군[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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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주요 선수[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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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갑이 그린 리즈시절 쌍방울의 스타 선수들




















4.6. 최후의 선수단[편집]






얼핏 보기엔 괜찮은 멤버 같지만 송구홍, 김성래, 박정현 등 과거의 스타플레이어들은 이미 선수생활의 황혼기, 심성보는 당뇨병 투병, 조원우는 부상, 이진영은 고졸 신인이었으며 김원형장종훈의 타구를 얼굴에 맞은 후 이때까지 재기 못했다.


4.7. 외국인 선수[편집]


당시 쌍방울이 1라운드서 지명했던 선수다. 2만 달러에 영입되어 시범경기서는 나름 잘 던졌지만, 컨트롤 문제와 팀의 사정이 겹쳐 퇴출당했다. 28경기 3승 3패 7.06(중도퇴출)

2라운드서 지명된 LG 출신의 선수, 선발로 보직이 바뀌어 자신감을 드러냈으나, 최악의 팀 사정으로 인해 좋지 못한 성적을 내고 돌아갔다. 19경기 2승 9패 6.75. 1998년에는 외국인 선수를 들여오지 않았으며, 1999년에는 투수용병으로 이들을 영입했다. 다만 성적이 신통치 않아서 문제. 김성근과의 갈등관계도 한 몫을 했다.


4.8. 기타 선수[편집]


내야수(유격수, 2루수). 정명원의 동생. 군산상업고등학교-원광대를 졸업하고 1990년 쌍방울 2차 1순위로 지명될 정도의 유망주였지만, 군 입대 후 복귀해서 성적이 별로여서 1995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재 군산대학교 앞에서 식당을 운영중이다. 카운터 앞에 친형 정명원 코치와 선수시절 맞대결했던 신문기사와 군산상고 경남고 레전드매치때 기사가 붙어있기도. 가게 이름은 라이스 스토리.

재일교포 출신의 투수로 일본명은 코야마 마사오(小山昌男)다. 그 당시 강호였던 나라현의 덴리고교를 졸업하고 1981년에 긴테쓰 버펄로즈의 드래프트 2번으로 입단했다. 통산성적은 86경기 23승 21패 4.81의 방어율을 기록하고 1992년에 같은 재일교포인 긴테츠의 황태호와 같이 쌍방울에 입단했다. 그러나 찢어지게 가난한 구단 살림으로 인해 생겨난 식사와 숙소 문제를 도저히 인간적으로 적응하지 못하겠다며 시즌이 채 시작되기도 전에 계약을 어기고 돌연 일본으로 귀국하고 말았다. 쌍방울의 흑역사 선수 중에 하나.

태평양 돌핀스에서 이적, 쌍방울의 창단 멤버가 된 선수로 3루수가 주 포지션이었다. 선수생활 동안 특별한 성적은 남기지 못했으며 이후 롯데로 이적해 은퇴했다. 이말년딸아이 이름짓기 편에서 상품으로 내건 싸인볼이 이 분의 싸인볼이다. 이후 삼성 라이온즈 프런트에 합류했으며 2020년 기준 스카우터로 재직중이다.

위의 강창남과 같은 재일교포에 같은 오사카 킨테츠 버팔로즈 출신의 투수이다. 일본명은 히야마 야스히로(檜山泰浩)다. 후쿠오카현 도스쿠고교 출신으로 1985년에 긴테쓰 버펄로즈 드래프트 1번으로 입단했는데, 그 당시 PL학원고등학교의 듀오였던 키요하라 카즈히로, 구와타 마스미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특급 유망주였다. 그 이후 미국으로 연수를 가서 루키리그에서 29연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우게 되지만 정작 일본에서는 1군에서 뛴 적이 한 번도 없어서 긴테츠에서는 흑역사 취급당하고 있다.
어쨌든 1992년에 강창남과 같이 재일교포로서 입단하게 되지만 강창남은 시즌을 한 번도 못 뛰고 먹튀를 한 반면 황태호는 1경기 무승 무패 81.00의 기록만 달랑 남기고 6월에 퇴단하고 말았다. 일본으로 귀국한 후 운동선수 출신으로는 아주 드물게 법무사 시험에 패스, 현재는 와세다세미나 전임강사로 야구선수 때보다 더 유명세를 타고 있다. 관련 일본 기사


5. 유니폼[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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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마스코트[편집]


마스코트는 방울이였다.
파일:external/www.1101.com/ball.jpg
방울이는 1980년부터 1991년까지[31]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공식 마스코트였던 "배트에 탄 소년(バットに乗った少年)"의 표절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닮았다.[32] 사실 야구공 머리의 인간형 마스코트는 1960년대부터 미스터 멧이나 미스터 레드 같은 사례가 메이저리그에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므로 요미우리 마스코트 역시 완전한 오리지널 창작 캐릭터라고는 할 수 없다.

아무튼 그것 때문인지 몰라도 과거 마스코트가 총출동한 2022년 kbo 40주년 기념 올스타전에서도 대놓고 표절인 삼미와 더불어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파일:VRGvINx.jpg
구단 해체 이후 마스코트 방울이 인형탈은 전주종합운동장 야구장에 버려져 있다. 이 사진은 2006년 3월 26일, 어느 야빠가 전주구장을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하여 촬영한 사진이다. 언뜻 보면 진짜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 같기도 해서 괜히 소름끼치기도 하다. 이 사진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3집 앨범커버에 사용되었는데, 해당 포스팅에는 이미 고인이 된 달빛요정의 사진 사용 문의 댓글이 가장 먼저 달려 있어 더욱 쓸쓸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쌍방울의 선수단을 이어받은 SK 와이번스가 창단 되고 21년 후, 야구단이 신세계로 넘어간 이후 마스코트 또한 비슷한 운명을 맞았다.


7. 역대 성적[편집]


­우승
­준우승
­포스트 시즌 진출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

드 = 드림리그, 매 = 매직리그
* = 공동 순위
연도정규 리그 순위최종 순위구단명경기수승률
1991*6위 / 8팀*6위쌍방울 레이더스126523710.425
19928위 / 8팀8위126411840.329
19937위 / 8팀7위126435780.361
19948위 / 8팀8위126475740.393
19958위 / 8팀8위126453780.369
19962위 / 8팀3위126702540.563
19973위 / 8팀3위126712530.571
19986위 / 8팀6위126582660.468
1999매4위 / 4팀8위132287970.224
KBO 리그 통산9시즌1140455306550.410


7.1. 역대 포스트 시즌 상대 전적[편집]


상대 구단개별 경기 전적시리즈 전적
현대 유니콘스96 PO : 2승 3패PO 1패
삼성 라이온즈97 준PO : 1승 2패준PO 1패
총합3승 5패2패


8. 사건 사고[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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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여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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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약칭은 'SBW Raiders'.[2] 법인 청산일은 2002년 12월 31일.[3] 제2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쌍방울 해체 이후에는 KIA 타이거즈의 제2 홈구장으로 사용하다가 2014년 광주-기아 챔피언스 필드 개장 후에는 KIA 경기가 열리고 있지 않다. [4] 창단 당시 구단주였던 이봉녕 쌍방울 창업주의 아들이다. 다만 1990~1998년에는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을 역임한 이용일 쌍방울그룹 부회장이 구단주 대행을 맡았다.[5] 1999년 올스타전 이후 김성근 감독의 해임으로 감독 대행을 맡아 시즌을 마무리했다. 2000 시즌 감독으로 내정됐으나 구단의 해체 후 SK 와이번스 수석 코치가 되어 한 시즌을 보내고 해임 당했다.[6] 경기당 평균 4,221명[7] 코로나19로 제한적 입장할 수 있던 시즌을 제외하고 KBO 역사상 가장 적은 연간 관중 수[8] 경기당 평균 757명[9] 그래도 전북 지역의 시장 수요 대부분이 이 지역에 거주했다. 전북 인구가 200만 명선에 턱걸이하던 1990년대 중반 당시 도내 인구의 70%에 육박하는 약 140만명이 전주-완주, 익산, 군산, 김제 등 전북 북서부에 거주했다. 물론 지금도 전북 인구의 대부분은 이 지역에 살고 있다.[10] 한술 더 떠서 1992년에는 140피홈런, 1999년에는 187피홈런으로 한 시즌 최다 피홈런 기록도 갈아치운 전력이 있다. 홈런공장 이 기록은 다음해에 이 팀을 대신하여 창단된 SK가 195개란 다시 나오기 힘들 기록으로 경신했다.[11] 2002년에 롯데가 타이기록을 세웠다.[12] 쌍방울이 치른 1999년 페넌트레이스 마지막 홈 4연전 중 (사실상) 세 번째 경기이자 공식적으로는 마지막 경기(상세한 내용은 다음 각주에 후술). 이날 쌍방울은 2-3으로 패했는데 이 패배로 1995년 이상훈 이후 4년 만에 정민태단일시즌 선발투수 20승 기록을 세웠다. 참고로 코로나19로 인한 무관중 경기를 제외하고 KBO 리그 역사상 한 경기 100명 이하의 관중이 들어온 적은 총 네 번이다.[13] 쌍방울은 1999년 10월 8일 전주구장에서 LG와 경기를 치렀고 이날 7:5로 승리를 거뒀는데, 이 경기는 원래 10월 6일에 치렀어야 할 더블헤더 2차전이었다. 10월 6일 대낮에 열린 1차전 개최에는 무리가 없었지만, 저녁 시간대에 편성된 2차전이 시작되자마자 전주구장의 낡은 조명탑이 고장나고 말았다. 그래서 이 경기를 일단 서스펜디드 게임으로 처리하고, LG가 다음 날인 10월 7일 잠실 롯데전이 예정되어있어서 일단 그 경기를 먼저 끝내고 다음 날인 10월 8일 다시 전주로 돌아와 6일 경기를 재개한 것이다. 그래서 공식 기록으로는 17연패 이후 6일 DH 2차전에서 1승을 거두며 연패를 끊고, 7일 마지막 경기인 현대전을 패배하며 시즌을 마무리한 것으로 남았다.[14] 재밌는 점은 이 기록이 원정팀들이 묵었던 전주 코아호텔의 귀신 목격담과도 관련있다는 것이다. 쌍방울 홈 17연승의 비밀 문서 참조. 당시 쌍방울을 맡았던 김성근 감독은 SK의 감독을 맡던 2009년 시즌 막판과 2010년 시즌 초에도 22연승 기록을 달성한 적이 있다.[15] 이 해에 쌍방울 불펜의 핵심이던 김현욱구원승으로만 20승을 거두는 기염을 토했다.[16]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반에 태어난 KBO 리그 선수 중에서 전북에서 태어났지만 타 지역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나와 타 지역 연고팀의 지명 선수로 입단한 사례가 꽤 있는데 이들이 초등학교를 졸업할 시점 내지는 고학년이던 시절 쌍방울이 해체되고 도시연고제 전환으로 광주 연고팀으로 한정된 해태의 우선지명도 어려워지면서 서울 등 수도권 학교로 전학을 간 이들이 많다. 대표적 사례가 군산 태생의 오지환과 전주 태생의 강지광 등이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군산상업고등학교 야구부 참조.[17] 정읍이평중학교, 정읍인상고, 고창영선고 등 3개교가 야구부 창단을 했으나 전라북도교육청과의 갈등으로 고창영선고는 2019년을 끝으로 해체되었다가 2023년부터 다시 운영을 재개할 예정이었으나 진전이 없다.[18] 특히 익산시는 초중고팀이 전혀 없다.[19] 하지만 쌍방울 선수 출신 지도자들은 현대야구에 역행하는 행보와 쌍방울 시절 구시대적 사고로 그다지 좋은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있는데, 대표적인 케이스가 KIA 타이거즈 감독으로서 우승을 선물했지만 말년에 악평을 받은 김기태. 심지어 박경완도 SK 감독 대행 시절 구단에서 장기적으로 지도자감으로 믿고 키워줬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야구에 역행하는 투수관리 및 혹사로 비판을 받았으며, 윤재국도 김성근 사단에서 영 좋지 못한 평가를 받았다. 비단 지도자뿐만 아니라 프런트에서도 고형욱송구홍이 부실한 선수 영입 등으로 비판받고 있다. 그나마 김원형이 투수코치 시절의 평가가 무난했고 감독으로서 2022년 한국시리즈를 우승시켰으나 여러 문제점이 도마 위에 오르다 2023년 포스트시즌 탈락의 책임을 물어 경질되는 등 끝이 좋지 못했다.[20] 참고로 당시 동국대학교 야구부 감독은 말년을 쌍방울에서 보냈던 한대화.[21] 은퇴 후 경기고등학교 야구부 투수코치로 부임했으며 곽연수 감독의 퇴임 후 감독으로 승진했다. 현재는 감독직에서 물러났다.[22] 통산 최다승(70승), 최다패(73패), 최다이닝, 최다완투, 최다완봉, 최다 탈삼진 등등 여러 기록보유.[23] 2군 코치 시절 육성 쪽에서는 괜찮은 평을 들었으나 1군 투수 코치를 맡은 뒤에는 투수 교체 타이밍 쪽에서는 평가가 나쁜 편이다. 1군 투수코치 김원형의 경우 롯데, 두산 모두 1년차에는 괜찮으나 2년차에는 투수들이 망가져서 나쁜 평을 받았으며, 2021 시즌은 한 팀을 이끄는 감독의 포지션이 되었으니 책임이 막중하다.[24] 만들어진 기록에는 상을 줄 수 없다는 기자들 사이의 불문율에 의한 것이었다.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에 대해서 기자들은 기록은 영원해도 상은 영원히 없다라고 맞불을 놓았다.[25] 이후 2년간 다소 폼이 떨어지긴 했지만 초창기 벌어들인 승수 덕택에 1996년까지는 팀 내 유일 통산 50승 이상 투수였다. 이후 김원형이 50승 돌파와 함께 꾸준한 활약으로 팀내 선발투수 관련 모든 기록 1위로 올라간다.[26] 2001년 조웅천과 함께 당시 신생팀이었던 SK의 전력 보강 목적으로 현금 트레이드로 이적했으나 2003 시즌을 앞두고 FA 박경완의 보상 선수로 현대 유니콘스에 돌아와 그해 우승 반지를 하나 더 끼고 KIA로 이적했다.[27] 기록 정정으로 1014경기에서 1009경기로 수정. 대주자로만 출장한 경기가 있었기 때문.[28] 2위는 OB 베어스에서 뛰었던 김형석의 622경기, 현역 중 1위는 500+ 경기를 연속 출전한 황재균.[29] 사이드암 투수 자체가 우완일 경우 우타자에 강하기 때문에 기용되는데, 좌완 사이드 암은 우타자에게 약하다라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30] 선수 은퇴 후 삼성 라이온즈의 불펜포수로 취직했다가 현재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불펜포수로 재직 중이다.[31] 1992년부터는 '자빗' 이라는 토끼를 사용한다.[32] 1980년대 교진군의 마스코트로 유명.[33] 축구 응원가로 잘 알려진 Ole Ole Ole 노래의 음정이다.[34] 이는 동시에 현대의 인적 승계팀인 히어로즈와의 마찰을 일으켰다. 2008년 SK 와이번스태평양데이 행사를, 히어로즈와의 경기에서 벌이면서 이 논란은 더욱 커졌다.[35] 인천시민들은 현대 유니콘스의 연고 이전과 새로 생긴 SK 와이번스의 정착 때문에 혼란스러워서 옛 쌍방울 팬들까지 받아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타 팀 팬들이야 자신들과 무관한 옛 구단의 팬들과 친할 이유가 더욱 없었고...[36] 한편 현대 유니콘스 해체 이후 재창단한 히어로즈 역시 처음에는 현대 색을 지우고 선을 그으려고 했었다. 이에 맞춰 현대 출신 고액 연봉 베테랑들을 트레이드하려고 시도했고, 현대 시절 마지막 감독인 김시진이 아닌 이광환을 감독으로 선임하기도 했다. 그러나 트레이드는 실패했고, 또한 이광환 체제는 안정적이지 않았으며, 이러한 현대의 외면은 조금이나마 남아있던 구 현대빠들을 흡수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으며 처참한 인기와 관중 동원에 그친다. 여기에 SK와의 정통성 경쟁 문제도 있었던 탓에 2009년부터는 전략을 바꿔 자신들의 전신격 팀인 현대 유니콘스과거 인천 연고 구단 시절의 팬들을 끌어안으려 애쓰게 된다.[37] 여기서도 오랜 기간 동안 광주전남 팬들에게 경멸과 왕따를 당하며 살아야 했다. "니네 팀은 어디갔냐?", "걍 야구팬 관두지 그랬냐? 우린 니네들 필요 없어."라고 조롱을 듣는 건 흔한 일.[38] 다만 출생지는 익산이나 실제 성장기를 보낸 곳은 안산이다.[39] 게임 내 닉네임도 '복실이돌격대'이다.[40] 그 대신 한화는 동군으로 나온다.[41] 현재는 구단이 KIA 타이거즈로 바뀌면서 구타, 똥군기 등 구시대적 문화들은 사라지고 있다. 해태 타이거즈에서부터 구타를 없앤 인물이 바로 이종범.[42] 오상민이 받고 싶은게 아니라 트레이너가 해준 것[43] 결국엔 태평양 돌핀스를 470억에 인수했다.